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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

임노식:PEBBLE SKIPPING 물수제비_통의동 보안여관
김맑음(독립기획자)


 이미지를 대상으로 작업하는 작가에게 무엇인가를 ‘눈에 담다’라는 표현은 일반적인 관용어를 넘어서기 마련이다. 이미지를 눈에 담고, 그것을 기억하고, 다시 자신의 매체로 옮기는 일련의 흐름은 하나의 작품이 구현되기 전에 작가들에게 낯선 과정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서 회화의 근원이 누군가 눈에 담은 것을 화폭에 옮기면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복기해본다. 그리고 그 화폭에는 단지 실재의 흔적만 남았다는 것까지도.
 임노식 작가는 자신의 외부에 있는 풍경을 관찰하고 작업실로 이동하여 캔버스로 옮기는 과정을 반복한다. 하지만 여기서 작가가 풍경을 관찰하는 것은 ‘관찰’이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로 대상을 상정하는 watch-ing의 모습이기보다는 어떠한 의도를 배제한 채 보는 see-ing에 가깝다. 이 진행상황에서 작가는 은연중에 자신의 눈에 담긴 이미지를 발견하는데, 이는 일상의 시공간이 중첩되면서 느닷없이 팝업처럼 인식된 것들이다. 이미지는 외부에서 떠내어져서 캔버스의 직조로 이동한다. 손으로 모래를 들어 올릴 때 떨어지는 모래를 잡을 수 없는 것처럼 이 메커니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유실되는 것이 생기게 된다. 흘러내리는 모래를 기억하는 것은 손가락 사이사이에 새겨진 감각의 잔존뿐이다. 어렴풋하게 새겨진 감각에서 시작되어 그런 것일까 파편으로 떨어진 이미지는 작가의 머릿속에서 작게 시작되지만 결국 커지는 흔적을 남긴다. 그렇다면 캔버스에 남겨진 이미지가 떠내어진 것인지 혹은 유실된 것인지에 대한 하나의 질문을 남기면서, 여기서 하나의 조약돌이 물속에 빠지면서 수면에 생기는 동심원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Pebble Skipping으로 번역되는 물수제비는 납작한 조약돌을 수면 위로 던지면서 조약돌이 얼마나 많이 수면 위를 튀기는지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얼마나 많이’는 조약돌의 이동을 직접적으로 보기보다는 그것이 남기는 동심원 모양의 물결 수를 보고 확인된다. 포물선의 궤적을 그리면서 튀어 오르는 조약돌은 가라앉기 전까지 물결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물수제비를 뜬다’라는 표현처럼 물 표면에 작게 파인 홈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이 작게 파인 홈이 물결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그가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작품들 역시 풍경-작업실-전시장의 궤적으로 이동했던 이미지들이 남긴 흔적이다. 마치 물수제비에서 하나의 동심원이 다른 동심원과 만나 또 다른 물결로 섞이듯이 그것들은 서로 뒤섞인다. 캔버스의 흰색에서 물감의 채색과 바니쉬까지 색채들이 얇게 켜켜이 쌓이고 겹쳐지면서, 뒤섞인 이 흔적은 그의 회화가 쉽사리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찰을 일으킨다. 임노식 작가는 풍경-작업실-전시장이라는 세 공간의 흐름이 어떻게 캔버스에 담기는지에 이어 이것이 어떻게 전시장에서 보여질 수 있는지 주목한다. 회화 프레임의 사각형을 유지하되 그는 이 사각형이 어떻게 전시공간과 마주하는지,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시장 내에서 회화 자체가 공간이 될 수 있는지까지 고민을 던진다. 이 답에서 그의 회화는 호를 그리거나 혹은 벽과 기둥과 같은 형태로 존립하게 된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화이트 큐브의 공간으로 간주되었던 창문과 천장의 보, 그리고 전시장 입구도 하나의 프레임으로 작동하게 된다.

 회화가 “보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풍경이 곧 누군가의 삶이자 한 자아의 내면과 외면을 총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는 작가노트의 구절은 이 프레임들을 하나의 궤적으로 만든다. 그렇다면 캔버스에서 남겨진 이미지가 무엇을 떠낸 것인지 혹은 무엇이 유실된 것이지 구분하는 질문보다는 그 이미지가 지금여기 전시장까지 이동하게 된 궤적에서 답을 찾아보는 것이 하나의 방향키가 될 것이다. 이 궤적의 시작인 물수제비가 던져지는 순간을 떠올려본다. 적당한 크기와 두께의 조약돌을 물가에서 찾아서 던지고, 그것이 수면에 부딪히는 순간까지 ‘얼마나 많이’ 물결을 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이 ‘얼마나 많이’의 마침표가 되는 것은 조약돌이 물속에 빠지는 순간이다. 보통은 그것이 물수제비의 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히 상상해 본다. 수면 아래에서는 그 순간이 새로운 물수제비의 시작이 될 수 있다고. 그래서 조약돌이 눈앞에 사라져도 그 물결은 우리 눈을 떠나지 않는다고.







풍경송신: 임노식의 작동기억으로부터 캔버스의 구멍 사이로
조주리(독립기획자)



 당연한 말 같지만, 회화가 구동되는 방식은 간 단치 않다. 재현의 대상과 결과물로 드러난 화 면이라는 이자적 구도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변인들이 존재하는데, 가장 핵심적인 매개항은 물론 화가 그 자신이다. ‘눈과 머리’로 제유되는 페인터의 감각 수신기는 그것들을 종합하고 해 석하는 고유한 독해 장치이자 동시에 커다란 몸통으로부터 손끝의 미세근육까지의 동시 협응을 지시하는 컨트롤러이다. 동일한 시공간이 작가의 육체와 지성을 통과하는 사이, 그 결과 물들이 다른 양태로 개별화되는 까닭일 것이 다. 누 천 년간 누려온 회화의 독자성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고, 동시대 이미지 생산자로서 회 화 작가들이 존립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무엇이 어떻게 회화로 변환되는지에 대한 착상의 시 점과 세계를 감각적으로 분할하고 배열해내는 과정은 작가의 언어적 표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블랙박스 안에 머물러있다. 작가 임노식은 임팩트 있는 시각성을 창출해 내는 데 온 에너지를 집중하거나, 이른바 포스 트 인터넷 시대를 지나고 있는 회화의 조건들 을 실험하는 범주의 작가군으로부터 슬쩍 비 켜서 있는 인상이다. 물론, 구체적 서사가 배제 되어 보이지만 실은 무언가 비밀스런 사건이 일어났거나, 곧 일어날 것 같은 음산한 서정이 배어든 화면의 잿빛 톤 같은 것들이 충분히 인상적이긴 하다. 게다가, 근작으로 올수록 독 특한 느낌을 주는 작업의 구성과 감성은 그가 전통 회화의 생산과 소비의 관습들로부터 확 연히 자유로워지고 있는 요즘 세대의 작가임 을 상기시켜 주기도 한다. 풍경 회화가 설치로 확장되는 단서들이 캔버스 안과 바깥에, 디지 털 세상에, 전시 공간에 다양하게 흩뿌려져 있 다. 그는 어떤 작업을 해나가려는 것일까. 여전히 젊은 작가인 임노식에게 ‘초기작’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겠지만, 2014년부터 몇 해 동 안 집중적으로 그려진 ‘축사 풍경’ 시리즈는 그 를 미술계에 각인시키게 한 일종의 ‘입봉작’이 되었다. 기법적으로 충분히 잘 그려진 작업들 이었고, 소재적으로도 ‘언캐니한’ 연작들이었다. 주목을 끈 점은 비단 그러한 요소때문만은 아 니었을 것이다. 지독하게 일상적인 공간이자, 가족적 풍경이었을 축사와 젖소의 모습을 잿 빛 톤으로 담아낸 초기의 작업들은 작가의 오 랜 기억 속에 담겨져 있던 이미지 더미로부터 출력된 여러 각도의 파편들이다. 나는 그 풍경 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낸 것이라고 생각하 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그저 대상을 ‘떠냈다고’ 도 볼 수도 없다. 작가는 확실히 대상을 보고 그렸겠지만, 아마도 (나의 가설에 따르면) 재현 의 본질적 과정은 그의 장기 기억 속에 풍부 한 라이브러리를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이, 화 면을 설계하고 그리고 채색하는 동안 다시 그 의 ‘작동 기억’ 로 옮겨와 좀더 단편적이고 심 리적인 미장센으로 번역되었을 것이다. 작동 기억(working memory)이란 일반적으로 단기기 억이 장기기억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관여하 는 기제로, 특정한 정보를 마음 속에 유지하고, 복잡한 층위의 인지 작업으로 도약하게 하는 중간 처리 과정이다. 반면, 익숙한 삶의 영역들 을 화폭에 재건하는 일은 장기기억을 낯설게 처최근 나는 임노식으로부터 그가 준비하고 있 는 다음 전시 <우연한 접목의 목격자>(가제) 의작업노트를건네받았다.작가는회화의 근원이누군가가눈에담은것을화폭에옮기 면서 시작된 것임을 복기한다. 그의 말을 빠짐 없이 옮겨본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담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면 그는 손바닥을 오므리는 형태를 만들고 손 을 천천히 올릴 것이다. ‘회화’의 복기는 바로 이 손에 담긴 풍경을 들어 눈으로 가까이 하 는 것에서 출발점을 가진다. 그러나 모래를 담 아 눈 가까이로 올리는 행위에서 떠올릴 수 있듯이 우리는 필연적으로 떨어지는 모래알들 을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다. 파편으로 떨어지 고 분산되는 모래알들은 이미 담고 있는 모래 더미를 놓칠 수 없기에 마치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서 조금 멀어져 그 형태 가 보이지 않는 것뿐이다. 캔버스의 직조 사이 사이에서 모래알처럼 풍경은 유실되고 결국 남는 것은 풍경을 담은 프레임인 동시에 그들 의 잔존이다.”

 작가의 사유가 도달한 지점은 무엇을 어떻게 그려내는가에 멈춰 있지 않다. 이윽고 혹은, 다시금 회화의 작동 방식과 회화 안에서의 풍경의 재건과 상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경계 혹은 장치로서의 프레임에 관한 언급은 회화에 담기는 것들의 여집합에 관한 의식이자 작업과 작업 아닌 것, 일상과 일상 아닌 것에 대한 총체적인 노트이다. 비교적 고 정적인 위치값을 점하는 정물이나 인물과 달리 풍경은 프레임 바깥으로 버려지거나, 포기 되어지는 데이터 값이 많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스냅 사진과 유사한 선택과 배제의 과정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과 또 달라, 현장에서 선택된 구도는 작업실의 캔버스 위 로 옮겨오면서 이후 회화의 실행 과정에서 매 우 독자적인(디지털 보정과는 전혀 다른 성격 과 층위의) 편집 과정을 거치게 된다.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최종적으로 선택되는 이미지들 은 개인적인 신체의 체험과 특별한 연관성이 있는 것들이다. 오래 머물렀던, 혹은 자주 걸어 다니는 장소를 벗어나 다시 그곳을 찾을 때 새로운 발견을 할 때가 있는데, 무뎌진 공간과 장면들은 삭제되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들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의도 적인 반복을 통해 무감각한 시공간을 걷어내 다 보면, 일말의 의미 없는 풍경들은 캔버스 구 멍 사이로 빠져나간다. 편집적으로 도려낸 풍 경이 아닌, 잔존하는 풍경이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작가의 설명은 회화가 얼마나 시간적인 장르인지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한다.

 다시 한번 작가의 작동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본다. 원어로는 말 그대로 ‘일하는’ (working) 기억(memory)이다. 축적된 기억 일부를 지워 나가기, 무감각해진 도시의 구석 안에서 접혀 있던 시간을 되살리기. 검푸른 영등포의 녹턴 과 창 너머 펼쳐진난지의 핑크빛 석양을 그리느라 분주했던 것은 붓을 쥔 손뿐이 아닌 그의 중추신경계, 운동 뉴런, 시상하부의 전달 물질이었을지 모른다.

 지난 몇 해 동안 임노식이 생산해낸 작업들이 말해준다. 어제와 다른 풍경을, 내일 소거지 모를 풍경을. 눈앞에 송신된 화면 속에서,캔버스 프레임 바깥으로 달아난 시간과 틈 사이 로 빠져나간 기억까지를 애써 더듬어 본다.









재현의 목적: 시감각적 풍경을 떠내기
장진택(독립 큐레이터)



임노식은 풍경을 그린다. 작가에게 풍경이란 바로 그가 바라보고, 느끼고, 포착한 것 순간을 옮겨낸 결과이다. 이는 곧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승화되어 작가의 시선이 향하고 머물렀던 곳의 인지 좌표로 관람자들을 인도한다. 그러나 이는 의도적으로 공감을 이끌어 내려는 인위적인 감성 자극이 아닌, 적당한 지점에서의 감각 나열 혹은 진열에 가깝다. 일반적인 풍경화와는 다른 공감각을 창출하는 임노식의 회화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 본 주변을 배회하고 부유하는 일상적인 공간이자, 그 순간 자체를 떠내어 수집한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그의 장면들은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거리를 작가 자신 혹은 관람자와 유지한다. 그러한 거리 두기를 통해 작가는 무언가를 본다는 것 그리고 이를 담아내려는 행위 등과 같은 인간의 본능적인 오감 활용법을 상기시키는 유형화된 미각 전유 방식을 선보인다. 어쩌면 그는 작업을 통해 생활에서의 ‘체험’과 그 때의 ‘감각’을 기록하는 것, 즉 예술에서의 가장 원초적인 이 두 미학적 행동축을 어느 곳에 어떻게 세워야 할 지를 나타내는 아주 일반적인 축적을 제시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부 과정에서 동양화를, 석사 과정에서 조형예술을 전공한 작가가 풍경이라는 장르화를 그리고자 한 것은 어쩌면 매우 자연스러운 선택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장르화라고 하면 보통 그 매체나 주제 혹은 표현의 기법이 명확하고, 그 구현에 있어서도 암묵적인 규칙성을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작업물이 상이하거나, 그에 대한 비평 또한 일정한 프레임을 따르는 경우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임노식의 풍경 또한 꽤나 정형화된 화풍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업이 다른 일반적인 풍경과 구별되는 이유는, 바로 작가의 표현이 단순히 공간에 대한 시각적 자료를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며, 나아가 공간과 시간을 아우르는 감각의 사유를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의 작업은 풍경이라는 장면을 구성하는 여러 표의적인 시각적 도상의 원본성에 신경쓰기보다, 그 때 그 장소를 체험하고 있는 작가의 감각 상황과, 이로 인해 맞닥뜨린 감각 상태의 근원을 순간적으로 갈무리하려는 시도에 집중한다.



이처럼 ‘풍경을 통해 표현하는 개인의 심리’ 개념은 임노식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주요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2016년 작가의 첫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OCI 미술관, 2016)으로부터 2017년의 전시 «접힌 시간»(합정지구, 2017) 및 2018년의 신작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와 시도의 회화적 실험을 통해 구축되어 왔다. 작가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공간인 목장과 축사를 그린 <안에서 본 풍경>(2016) 연작이나 <착유실>(2016), <급유기>(2016) 등의 연작들은 사적인 경험에 대한 기억을 풍경으로 재현한다. 교외와 도시 혹은 자연이나 인공과 같은 양극적인 체험의 차이, 그 이면에서 재생산된 비가시적 가치의 의미나 서로 다른 사회 그 각각에 대한 가치 판단에 집중했던 이 시기의 작업은 풍경을 그려내기 위한 관찰이라는 행위에 몰입하는 자신의 모습을 굳건히 해 줄 수 있었던 반면, 작가의 회화를 ‘기억의 기록적 재현’이라는 통상적인 풍경의 틀 안에 머물게도 했다. 또한 본 작품들은 임노식 회화가 아우르는 공간이라는 시각적 요소와 그 순간의 감각이라는 두 가지 특징, 그리고 이 둘을 하나의 작업으로 맥락화하는데 활용한 기억과 기록이라는 방법론 사이에서 그가 기록보다는 기억을 통해 공간 자체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되새기는데 몰두했음을 보여준다. 


이후 2017년 작업에서는 이보다 한 단계 다른 차원으로 임노식의 회화를 이동시키려는 스스로의 확연한 노력을 감지할 수 있다. 우리가 밟고 딛는 땅을 그린 <Ground>(2017) 연작이나 지평선이나 먼 산을 그린 <Landscape>(2017) 연작 그리고 어두운 하늘을 그린 <Sky>(2017)와 같은 연작들은 여전히 자연의 풍경을 화면 속으로 소환한다는 점에서 그의 2016년도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한다. 그러나 이는 풍경을 있는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주체 시선의 명도나 배율을 조정하며 풍경의 표현 자체를 실험한다는 점에서는 전작과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은 작업 태도의 변화는 당시 풍경을 바라보는 그 순간의 감정을 좀 더 정확히 옮겨내고자 했던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바로 이러한 지점이 점차 임노식의 풍경에서 기억보다는 기록이, 공간의 명시성이나 장소성보다는 이를 체험하는 작가의 감각이 부각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때문에 이 시기의 작업들은 구상성의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려버림과 동시에 장면 속의 공간도 이전보다는 높은 배율로 확대되어 그려지는데, 특히 <파수꾼>(2017)에서는 기억에 기대어 있는 장소성의 의미를 거의 삭제하면서 오롯이 시선 주체의 감각성만을 조명하기도 한다.


2018년 임노식의 풍경은 일상의 영역을 투영하며 곧 삶이 되었다. 최근 작업 <Screenshot>(2018) 연작에서 작가의 시선은 더이상 먼 곳을 바라보거나, 그 사유의 흐름을 광활하게 진전시키지 않는다. 대신 그 보다는 근거리에 있는 대상을 관찰하며,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시선을 고정하거나, 그 순간의 사유에 천착하고, 그 깊이를 깊게 끌어내린다. 이러한 변화는 관람자가 그의 작품을 마주할 때 마치 그의 내면을 찍은 사진첩을 열어 보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작품은 곧 작가가 어디론가 이동하며 불현듯 시선을 두었던 곳을 반추하게 하거나, 그가 항상 머무르는 공간을 함께 관찰하도록 관람의 심상을 이끌기도 하며, 타인의 시선이 포착한 시각적 정보를 통해 그의 생활 (패턴)이나 삶에 대한 태도를 가늠하도록 해준다. 주위에 산재한 보통의 풍경을 담아낸 임노식의 근작들은 어쩌면 특정한 공간이나 장소가 개인에게 덧씌우는 심오한 예술적 의미 울타리 안에 우리를 가두지 않고, 풍경을 그린 주체의 시선과 심상에 대한 일종의 ‘떠내기’ 작업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이러한 작가의 작업은 현재 재현이라는 시각 언어에 대한 상호 이해 방식이 어떠한 형태로 통용되고 있는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풍경은 무엇을 재현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동시대 풍경은 무엇을 재현해 내어야 하는가? 과거와는 달리, 임노식의 회화는 기록과 기억의 의미, 공간과 이를 감각하는 주체의 시간적 체험과 같이 기존에는 잘 다루어지지 않았던 다양한 담론을 풍경이라는 장르 안으로 불러들이며, 그 풍경의 대상이 가졌던 전통적인 형이상학적 의미를 재현 주체의 시선과 체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낸다. 이를 통해 그는 재현의 대상과 그 목적이 우리가 ‘보는 것’에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한 것’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하며, 풍경이 곧 누군가의 삶이자 한 자아의 내면과 외면을 총체적으로 재현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따라서 우리는 임노식의 풍경을 곧 작가 자신을 구성하는 다양한 감각의 파편들이라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그가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이로 인해 이제 재현의 의미는 그 한계를 벗어나 완전히 확장되었다.   










어제와 다른 풍경
임노식: 접힌 시간 Folded Time_합정지구
안소연(미술비평가)



형상이 쉽게 드러나지 않는 이 그림들은 “접힌 시간”의 장면들로 제시되고 있다. 임노식은 이번 전시의 제목을 《접힌 시간》이라 정했고, 대부분 칠흑같이 어두운 풍경이 그 말의 이미지들로 엮인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긴 어둠 속 풍경은 수많은 형상들이 중첩돼 어떤 임의의 작은 홈들(porous)을 가진 또 다른 시공을 암시한다. 임노식은 그의 첫 개인전 《안에서 본 풍경》(2016, OCI미술관)에서, 목장을 소재로 울타리 안과 밖의 물리적 경계를 통해 한 개인의 탈중심화된 심리적․사회적 경계에 대한 사유를 시도했었다. 목장 집 아들인 그가, 어린 시절부터 줄곧 집처럼 드나들던 목장에 대한 다중적 경험을 통해 일상의 공간을 인식하는 시각적 위계에 대해 물음을 던졌다. 그것은, 이제 제법 익숙해진, 안과 밖, 빛과 어둠, 폭력과 방어 등 이분법적 차이가 흐려진 혼돈의 틈새에 대한 사유를 따르고 있었다. 이어서 두 번째 개인전인 《접힌 시간》은, 그가 매일 매일 같은 시간에 오갔던 길 위의 풍경과 그때의 경험을 다룬다.

만약 빛을 섬세하게 조율해 놓지 않는다면 <ground_1>(2017)와 <sky_1>(2017)은 차라리 검은 캔버스거나 혹은 엉겨있는 물감 자국에 가깝다. 하지만 적당한 빛이 캔버스에 파고들었을 때 표면에 드러난 형상은 한 순간 묘한 공간감을 구축한다. 수평으로 마주하고 있는 검은 캔버스의 표면이 사실 내 머리 위로부터 수직으로 무한히 확장되는 공간을 담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 접혀 있던 시간적 층위가 드러나면서 그 공간에 주어진 시간성과 그 순간에 대한 몸의 경험을 상상케 한다. 임노식은 도시 공간 속에서 매일 반복되는 자신의 일상적 경험을 통해, 그 반복이 만들어내는 보이지 않는 차이를 인식하면서 스스로 “시공간적 존재”에 대한 사유에 차츰 몰두해 온 것 같다.

이를테면, 그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집과 작업실을 오가면서 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반복되는 도시의 밤 풍경을 봐왔다. 한 가지 종류의 가로수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장막처럼 머리 위 시야를 덮고, 보도블록 위로 차곡차곡 떨어지는 가로수 그림자가 도시의 밤을 더욱 어둡게 했다. 새벽 2시, 작업실에서 나와 습관처럼 같은 풍경을 보며 걷다 보면 그 찰나의 경험 보다는 반복을 통해 길들여진 공간에 대한 인식에 갇혀 위축되고 무감각한 존재가 돼버리기 쉽다. 그의 말대로 그는 늘 “같은 바닥, 같은 시간, 같은 풍경을 보며” 길을 걸었다. 어느 날, 그 길을 다시 걸으면서 그는 문득 “어제와 다른 바닥, 다른 시간, 다른 풍경”을 인식하게 됐고,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구체적인 시공간 속의 존재와 그때의 구별된 경험을 알아챘다.


<sky_2>를 보면, 길 위에 서서 올려다 본 가로수 이파리들의 가장자리가 보이고 그것을 경계로 검은 밤하늘이 평평한 배경을 이룬다. 아니, 다시, 어두운 밤하늘이 아득히 먼 공간적 거리감을 상실한 채 캔버스 표면에까지 바짝 다가와 그것을 에워싼 가로수 이파리들과 완전하게 포개어져, 사실상 형상과 배경의 흔한 위계적 클리셰는 지워지고 두 개의 경계가 맞닥뜨려지는 비위계적 시공간을 암시한다. 어쩌면 그가 《안에서 본 풍경》에 이어서 이번 전시를 통해 유독 밤풍경에 몰두했던 것은, 그 시공간이야말로 가장 현실에 가까운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낮과 낮 사이에서, 일련의 혼돈의 힘을 지닌 중간존재(interbeing)로서 사유될 수 있었기 때문일 테다.

그는 매일 밤, 같은 시간, 같은 바닥, 같은 풍경을 거닐면서 서서히 새롭게 몸에 각인되는 감각들을 경험했고, 그것은 마치 접힌 시간들처럼 다중의 시공간이 계속 중첩되다가 불확실한 어느 때에 느닷없이 인식됐다. 임노식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실제적인 몸의 경험과 그것을 통해 끊임없이 재인식되는 지각의 작은 홈들을 포착하려 한다. 그리고 그 경험에 대한 사유는 곧바로 회화에 대한 경험으로 다시 구체화되면서, 대기의 암흑 속에서 형상과 배경이 뒤섞인 밤 풍경은 어느 순간 공간의 질서와 위계가 지워진 회화의 평면 위에서 그 혼돈의 경계를 더욱 실감케 한다.

한편 <wall_1-10>(2017)의 경우, 작게 조각난 열 개의 풍경은 보이지 않는 희미한 단서들로 끈질기게 다시 연결되고 그러다가 어둠의 틈새 속에 또다시 고립되기도 한다. 이는 마치 전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대로 수많은 절개선을 내포하고 있는 접힌 시간들처럼, 쉽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미 들뢰즈의 리좀적 사유를 통해 인식한 바와 같이) “접기”와 “펴기”의 반복되는 사유를 통해 안과 밖을 절개하여 홈을 낼만한 위력의 잠재적 공간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이처럼 분열적 시공으로서의 밤 풍경에 대한 깊은 사유는, 그에게 회화의 형식 안에서 공간(감)에 대한 탐구와 유희를 지속시킬만한 강한 동기를 제공한다.

<sky tower>(2017)은 쓰고 남은 자투리 캔버스 천을 버리지 않고 모아서 같은 크기로 자른 뒤, 매일 보았던 밤하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그 잔상을 하나씩 그려 차곡차곡 쌓아놓은 것이다. 100여 장의 작은 그림들은, 말 그대로 같은 자리에 켜켜이 쌓여 올라가는 다층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주목해 볼만한 것은, 시작도 끝도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기둥 속에서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부분이 중간층 밖에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림과 그림 사이, 위와 아래 사이, 수직과 수평 사이, 시작과 끝 사이에서 특별한 권한조차 누리지 못하는 중간존재로서의 이 불확정적 형상이야말로, 암흑처럼 규정할 수 없는 밤 풍경에 대한 인식을 대변한다.

임노식은 일상에서 밤의 풍경에 새롭게 조율되어 가는 몸의 감각을 체감했고, 그 경험에 더욱 몰두하여 일련의 그림처럼 어떤 구체적인 것에 다가가려 했다.
<screenshot_1>(2017)과 <screenshot_1>(2017)을 보면, 그가 창문에서 바라다본 밤의 특별한 장면들과 꽤 오랜 시간 마주하고 있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창문에 묻은 뿌연 얼룩, 건너편 건물 지붕을 덮고 있는 낡은 방수천, 건물 외벽 창문의 희미한 불빛들과 혹은 불 꺼진 창문들, 그리고 제 그림자와 뒤엉켜 버린 어둠 속의 나무들… 창문으로 바라본 이 각각의 광경들은, 주기적으로 어떤 시간에 서로 뒤섞여 다중의 공간을 함축하는 접힌 시간으로서의 밤 풍경을 확인시켜준다. 임노식은 바로 그 시공간에 대한 지각의 경험과 사유를 통해, 일상의 풍경에 저항하는, 바로 어제와 다른 풍경을 구축하려 한다. 접힌 시간처럼 혼돈을 품고 있는 이 밤의 풍경들에서는, 현실의 시공간이 더 이상 현실의 그것이 아닌 존재로 다르게 지각된다.









잿빛 경계, 보류된 판단
임노식:안에서 본 풍경_OCI미술관
황정인(사루비아다방 큐레이터)


안개 낀 새벽처럼 희뿌연 대기 사이로 단단한 구조를 드러낸 강철 울타리. 오랫동안 무언가가 밟고 지나며 남긴 흔적. 그것의 육중한 무게 때문인지, 한겨울의 추위 때문인지, 단단하게 다져진 채 굳어진 대지의 표면은 울타리의 안과 밖을 잇는 희미한 길목이 되었다. 길이 인도하는 방향을 따라 서서히 시선을 움직이면 알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을 법한 암흑의 세계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그 내부로부터 다시 눈부신 빛이 비추는 문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면, 이내 불투명한 회색 공기로 둘러싸인 밀실로 인도하는 또 다른 울타리가 기다리는 풍경. 임노식은 자연에서 목도한 인위적인 상황과 흔적에 관한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경계의 형태와 그것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갈등과 인식, 가치판단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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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를 전공한 작가에게 자연은 그림의 소재이기 전에,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의 유년시절 평범한 일상은 오랫동안 목축업을 일궈 오신 아버지의 곁에 머물면서, 목장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을 직접 체험했던 시간과 궤를 같이한다.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사회단위를 경험한 작가에게 목장은 그 다음으로 자연 속에서 접한 사회의 작은 축소판과 다름없는 대상으로서, 가치판단을 하는 나이로 접어든 그에게 자연스럽게 세계에 대한 관찰자적 시선을 심어준 터전이다. 평범한 일상이 관찰과 의문의 대상이 되는 길목에서 그가 경험한 사회는, 목장처럼 울타리로 구획되어 안과 밖의 경계가 있으나 좋고 나쁨, 안전과 위험, 자유와 결박, 일탈과 구속과 같은 양가적 가치로만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모호함이 존재하는 곳이며,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는 소처럼 진실을 알고 있으나 침묵할 수밖에 없는 현실 공간이다.
울타리를 경계로 나눠지는 두 개의 세계에는 자연과 인간이 각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가치판단의 문제가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두 대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고 적응하는 과정 안에서 또 다시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없는 판단의 문제에 계속해서 도전을 받는다. 가로 길이가 약 9미터에 달하는 은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자, 그가 현실을 투영한 하나의 작은 사회로서 목장을 바라보게 된 중요한 계기를 고백하듯 담아낸 대작이다. 그는 몇 년 전 가축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일정량의 전류가 흐르고 있는 구조물 밖으로 목장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젖소 한 마리가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했으나, 엄동설한 속에 얼어붙은 세상과 마주한 끝에 결국 다시 스스로 목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목장은 강제적인 임신과 착유가 진행되는 폭력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생명의 탄생과 생존을 위한 출산, 사육, 치유와 보호가 이뤄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목장의 역할과 기능 안에서 정해진 틀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소들의 삶은 외부에 의해 통제된 사회로부터 일탈을 꿈꾸지만 결코 사회를 떠나서 살 수 없는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가 그려낸 이란, 단순히 울타리라는 물리적 공간 구획이 만들어낸 안과 밖의 풍경의 모습을 그린 것을 넘어, 눈앞에 닥친 현실과 그에 반하는 이상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뒤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갈등하는 내면의 심리와 이를 통해 바라본 세계에 관한 이야기다.

이러한 내면의 심리를 담은 임노식의 풍경에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한 사유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인 공간이 자주 등장한다. 과 는 제목에서처럼 목장의 업무에 따라 구획된 공간과 시설을 그린 작품이다. 이전의 연작(2014)에서 착유와 교배가 진행되는 일련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했던 것과 달리, 작가는 근작에 이르러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는 목장의 공간 구조를 객관적으로 관찰하여 담아내고 있다. 각각의 공간에서 이뤄졌을 갖가지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무언가를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구획된 장소에서 사육하는 자와 사육을 당하는 대상이 머물렀을 공간의 모습은 모노톤의 화면 안에 건조하게 기록된다. 또한 그의 화면에서 공간은 단단한 벽체와 강철 울타리를 기점으로 안과 밖이 물리적으로 구분된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빛과 어둠의 대비를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덧입기도 한다. 빛은 그의 그림에서 표면적으로는 어두운 실내와 대비되는 햇빛 가득한 자연 공간으로의 해방 또는 일탈을 의미하지만(), 심리적으로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야생의 환경으로부터 안전하게 관리되는 목장의 시스템을 의미하기도 한다(의 화면 중앙). 반대로 어둠은 인간에 의해 자유로운 삶을 억압받는 생명들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적응해야만 하는 통제의 공간이지만(), 생명이 유지되는 공간이기도 하며(), 때론 안락한 목장과 달리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은 채 방치된 야생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의 화면 양측). 이와 같이 안과 밖의 공간이 지닌 중의적 의미에 대한 작가의 사유는 고된 노동 후에 오물이 잔뜩 묻고 땀에 전 작업화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려낸 (2014)에 대한 그의 작업노트에서도 그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장화는 외부의 오물로부터 발을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보통 더러운 일을 할 때 장화를 신는다. 하지만 일을 마치고 장화를 벗으면 땀에 절어버린 발을 보게 된다. 우리의 삶도 이와 비슷한 것 같다. 외부의 더러움을 인식하지만 그로 인해 내부에서부터 차버린 더러움을 인식하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4년작 에 대한 작업노트 중에서.

이렇듯 그가 그려내는 공간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며, 흑과 백의 구분처럼 극단적인 의미를 지녔던 가치들은 뿌연 잿빛처럼 묘사된 대기의 흐름 속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조금씩 상실해간다. 즉, 임노식의 그림에서 자유와 구속은 그 어떤 것도 완전한 정의 아래 규정할 수 없으며, 이는 입구이자 출구이며, 안이면서 밖이 될 수 있는 공간의 경계를 담은 화면구성을 통해, 그리고 빛이 비추지만 암울한 현실처럼 눈부시게 환하지 않으며, 어둠이 서려있으나 희망이 사라진 칠흑 같은 암흑으로 표현하지 않는 무채색의 섬세한 변주를 통해 전달된다. 아울러 그가 최근 라는 이름으로 진행하고 있는 일련의 연작은 일상의 풍경 속에서 이러한 양가적 의미와 가치를 환기시키는 인공적이고 건축적인 공간의 구조에 더욱 집중한 작업으로서, 공간과 그 의미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목장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머물지 않고 보다 보편적인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임노식의 회화는 지극히 사적인 경험과 기억 속에 각인된 공간에서 출발하지만, 그가 화면에 담아낸 경계의 풍경은 섬세한 명암대비와 화면구성을 통해 사회 구조 속에 내재한 다양한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환기시킨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는 마음속에 끊임없이 생성, 소멸, 충돌하기를 반복하면서 우리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건넨다. 결박된 현실로부터의 탈출이 가져오는 고통을 감내할 것인가. 고통스럽지만 익숙한 현실의 구조가 만들어 낸 일시적인 안주와 평안을 선택할 것인가. 지금 이 순간 각자가 마주한 현실의 울타리는 과연 무엇인가.